개성을 빛낸 명사 쌍계(雙溪) 김진구(金鎭九) ()

그의 아들 소계(小溪) 김정호(金正浩) 선생 (1)

김조형

송중 32-Щ

-사진 7675 or 7678 4.5x5.5cm- 쌍계 김진구 옹

 

김진구(金鎭九) 옹과 김정호(金正浩) 선생의 집안은 1930년대 들어서 개성(開城) 1 부자로 등극한다.

1906년의 자산가(資産家) 조사표를 보면 추수고(秋收高) 3,000(), 신용정도에서 김진구 집안이 개성 2 부자였으며 개성에는 한말(韓末)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김여황(金麗煌)-김원배(金元培) 집안이 계속 1 부자로 군림했었다.

 

-사진 0345-

개성부력상태(開城富力狀態) 고려시보 1933 5 16일자 기사 ; 1933년 개성부 호별세(戶別稅) 등급별 부과를 보여주는 기사로 이것으로 부력(富力)을 평가했다.

개성에는 4등급 부과자 김정호씨가 1등 부자이고, 2등 부자는 한명석씨로 6등급 부과자였다.

김진구(金鎭九) () 본관이 청풍(淸風)이고 호는 쌍계(雙溪)이며 1854 음력 7 6일에 태어나 1928 75세로 별세할 때까지 장수한 분이다.

옹의 행장(行狀) 의하면 1887 34세에 처음으로 관직(官職) 진출하여 1893 의금부 도사(都事) 되었으며 4월에 제릉령(齊陵令) 임명되었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주목되는 것은 제릉령 벼슬이다. 개성에서는 김진구 집안을 김령댁(金令宅)이라고 불렀다. 1898 제릉령을 의원 면직하고 1900 시종원 시종(侍從) 임명된다.

 

김진구 옹의 부친은 김규도(金奎燾) ()으로 관직은 진사, 6 1녀를 두었다.

장남 김진구(金鎭九 1854 , 관직 제릉령)

차남 김진오(金鎭五 1860 , 관직 주사)

3 김진익(金鎭益 1867 , 관직 참봉)

4 김진철(金鎭喆 1870 , 관직 진사)

5 김진만(金鎭萬 1873 , 관직 진사)

6 감진억(金鎭億 1875 , 관직 참봉)

장남 김진구 옹은 부친이 별세한 재산(財産) 분재(分財) 미루고 자신이 과감한 투자를 반복해 재산을 증식하여 다섯 동생들에게 훨씬 많은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6형제 모두가 분재 받은 재산을 불려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유복(裕福) 가정을 이룩하였으며 관직(官職) 진출하여 나라와 지역사회에도 크게 공헌한 훌륭한 가문(家門)이다.

당시 아들 여섯을 훌륭하게 키워 모두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예가 흔하지 않았기에 김진구 집안 김령댁(金令宅) 개성 장안에서 칭송(稱頌)받는 집안이었다.

 

김진구 () 집안의 가업(家業) 인삼(人蔘) 경작(耕作)이었던 같다.

왜냐하면 () 관직에서 물러나 종삼포(種蔘圃) 수년간 경영하였는데 이를 선업(先業)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대(先代) 인삼 경작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가업 전통과 본인의 인삼 경작 경험으로 인해 대한제국(大韓帝國) 조정(朝廷) 삼정(蔘政) 두드러진 대외활동은 한다. 예컨대 궁내부 경리원에서 1903 이후 홍삼(紅蔘)제조를 감독하는 감찰관(監察官) 선임했는데 3 연속 감찰관에 임명되었다. 이는 김진구 옹과 공응규 (‘송도 155 게재 춘포 공성학의 부친) 뿐이다.

뿐만 아니라 경리원에서 삼병해(蔘病害) 관련하여 건전한 종삼(種蔘) 확보하려고 종삼회사(種蔘會社) 세우고 회사의 사장(社長)으로 김진구 옹을 선임하였다. 이처럼 김진구 옹은 한말(韓末) 삼업계를 대표하는 존재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옹은 단지 인삼경작에만 두각(頭角) 나타낸 것이 아니었다.

앞서 보았듯이 지주(地主)로서도 3,000() 수확고를 갖고 있었다. 옹의 부력(富力) 1901 목청전(穆淸殿) 중수(重修) 개성부민들의 기부액을 기록한 목청전중건조성책(穆淸殿重建助成冊) 통해서도 확인할 있다. 조성책에는 기부액수에 따라 이름이 적혀 있는데 당시 부윤(府尹) 박우현(朴宇鉉) 옹이 홀로 1()량을 기부하고 있고 다음은 4인이 8()량씩을 기부하였는데 4 가운데 김진구 옹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김진구 집안은 인삼경작과 지주경영에서 모두 빼어난 성과를 거두는 개성을 대표하는 부호(富豪)였다.

 

여기서 개성 인삼경작(人蔘耕作) 관하여 살펴본다.

한일합방(韓日合邦) 당하자 안삼경작자 60여명은 공동 이익(利益) 증진하고 쇠퇴(衰退) 삼업을 회복하며 나아가 장래의 발전을 기도한다는 취지로 1910 3 개성삼업조합(開城蔘業組合) 설립하여 조합장에 손봉상(孫鳳祥) 그리고 이사에 공성학(孔聖學), 김정호(金正浩; 김진구 옹의 장남) 유력한 개성상인들이 간부(幹部) 참여했다. 후에 조합장 손봉상, 부조합장 공성학, 이사 김정호 체제가 장기간 계속되면서 인삼경작법을 연구개량(改良)하여 삼병해(蔘病害) 줄이고 인삼의 품질(品質) 수확량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개성인삼(開城人蔘) 뿌리를 찾아보면 개성은 원래 인삼 재배지(栽培地) 아니었다. 개성상인들이 인삼의 () 고장인 전라도 동복(同福) 지방을 왕래하면서 경작법을 터득하여 이것을 자기 고향인 개성에 전파(傳播)한데서 유래한다. 이때가 19세기 중엽 순조(純祖) 시대로 추측된다. 개성은 중국으로 가는 무역(貿易) 요충지이고 기후(氣候), 풍토(風土) 인삼재배에 알맞아 세월이 흐르면서 유명한 인삼 생산지로 부상(浮上)한다.

 

김진구 () 한말 교육(敎育)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국권(國權) 회복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옹이 처음으로 설립한 학교(學校) 개성 동부 바줄래골 입구의 맹동의숙(孟洞義塾)이었다. 학교는 1910 사립 삼인학교(三仁學校) 바뀌었으며 김진구 옹은 10 동안 교주(校主)로서 교육사업(敎育事業) 전념하였다. 옹은 학교 재산(財産) 개성공립보통학교에 기부하였고 학교가 후에 개성선죽보통학교(開城善竹普通學校) 발전하였다.

김진구 옹은 한편 일본(日本) 시찰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일본의 교육실태(敎育實態) 시찰하고 돌아온 고등보통학교 과정인 게상공립상업학교(公立商業學校) 설립에도 앞장서 교사 건축(建築) 위원장(委員長) 맡기도 했다.

옹은 일제 강점기(强占期) 1912 군참사(郡參事) 피임되었으나 개월이 지나서는 고령을 이유로 사직(辭職)하였는데 이때 연세가 59세였다. 김진구(金鎭九) () 공식적인 사회활동에서는 은퇴(隱退)했으며 교외 신암동(神巖洞) 별장을 지어 놓고 1928 75세로 () 마칠 때까지 음풍농월(吟風弄月) 소일하셨다.

 

 

 

 

개성을 빛낸 명사 쌍계(雙溪) 김진구(金鎭九) ()

그의 아들 소계(小溪) 김정호(金正浩) 선생 (2)

 

김조형

송중 32-Щ

-사진 4.5x5.5cm- 소계 김정호

김정호(金正浩) 선생 호가 소계(小溪)이고 1885 김진구 옹의 장남(長男)으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00년대 초에 일본에 유학하여 1915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法科) 졸업하였다. 1917년까지는 김기형(金基炯)이란 이름으로 활동하였으나 이후에는 김정호(金正浩) 개명하였다.

김진구 옹의 경제력은 아들 김정호 선생이 승계(承繼)하였다. 선생은 아버지대() 개성 2위였던 집안의 경제력을 1위로 성장시킨 분이다.

특히 김정호 선생은 많은 근대적(近代的) 회사(會社) 설립하여 경영하거나 혹은 자본을 투자하여 개성의 자본이 근대적 기업(企業)으로 전환하는데 적극적인 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정호 선생은 당시 개성사회에서 유력한 인물로 인정받아 각종 사회단체(社會團體)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기에 19201930년대 개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있다.

 

김정호 선생이 이룩한 부력(富力) 일면을 보면

1920 수삼(水蔘) 배상금(賠償金) 67,660원이었으나 1921년에는 101,824원으로 증가하여 이는 인삼왕(人蔘王) 손봉상(孫鳳祥) 공성학(孔聖學) 이어 번째로 많이 받은 배상금이었다. 이로서 선생은 1920년대 초반 개성 3 삼포주(蔘圃主) 사람임을 말해준다.

1937 경기도 관내 대지주(大地主) 조사에서 김정호 선생은 271정보(町步) 소유하여 개성 4위의 대지주였다. 반면 손봉상, 공성학은 거대(巨大) 삼포주였지만 김정호 선생만큼 대지주는 못되었다. 마찬가지로 한명석(韓明錫), 김원배(金元培), 고한봉(高漢鳳) 등은 개성의 거대(巨大) 지주였지만 삼포경영에 김정호 선생만큼 거대 삼포주는 되지 못하였다.

이렇듯 김정호 선생은 삼포경영(蔘圃經營) 대지주(大地主) 분야(分野)에서 높은 위치를 점유해 1930 개성 최고(最高) 부자(富者) 자리에 오를 수가 있었다. 1933년과 1934 호별세(戶別稅) 부과기준으로 평가한 부자 순위에서 개성부자 한명석을 제치고 개성 최고 부자의 위치를 보여준다.

 

사진 개성부력상태 고려시보 1934 5 16일자 기사

개성에는 3등급 부과자 김정호씨가 1등 부자로 나타나 있다.

 

경제학자 조기준(趙璣濬) 박사의 저서한국기업가사(韓國企業家史) 살펴보면김정호는 구한말 개성 부자 김원배와 달리 개성 자본을 근대적인 기업 설립으로 전환하는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일제하 개성 부호가운데 근대 기업에 자본을 투자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평하고 있다.

 

김정호 선생은 여러 회사에 자본을 투자하여 중역을 역임하였을 아니라 직접 회사를 세우기도 하였다. 선생이 세우거나 경영한 회사중 개성에 대표적인 회사로는 개성전기주식회사(開城電氣株式會社)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 있다. 회사의 자세한 소개는 뒤로 미루고 김정호 선생이 개성에서 사회경제(社會經濟)분야에 참여하고 활동한 것을 살펴본다. 당시 개성의 상업계는 영신사(永信社) 개성사(開城社) 양대(兩大)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회사는 개성 전체의 사회적인 기업이었고 상품의 거래와 위탁판매업, 금융업 그리고 창고업을 경영하는 회사로 개성상인들의 특징을 드러내 보이는 회사다.

 

합자회사 영신사(永信社) : 자본금 30만원으로 설립됐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장인 손봉상과 전무인 김정호, 이사에 공성학, 김원배, 김득형(金得炯), 김기영(金基永) 거부(巨富)들이 참여했다.

 

합명회사 개성사(開城社) : 자본금 30만원을 투자한 회사로 개성 군수(郡守) 박우현이 사장, 그의 형제인 박태현(朴泰鉉) 고도후(高燾厚), 김익환(金益煥) 등이 참여했고 포목(布木) 전문상이었다.

 

개성삼업조합(開城蔘業組合) : 1910 3월에 창립됐으며 조합장에 손봉상 그리고 김정호 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즉시 1915 이사로 참여했다.

 

고려삼업사(高麗蔘業社) : 1919 영신사 사장인 손봉상이 창업했으며 김정호 선생은 전무에 취임했다.

 

-사진- 고려삼업사 신문광고

 

송도도기주식회사(松都陶器株式會社) : 1922 개성사 사장인 박우현이 창업했으며 김정호 선생은 전무로 참여했다.

 

고려인삼동업조합(高麗人蔘同業組合) : 1923 2 김정호 선생이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송도고무공업주식회사(松都고무工業株式會社) : 1927 김기영(金基永) 창업할 당시 김정호 선생은 이사로 참여했다.

 

개성상공회의소(開城商工會議所) : 1931 7 설립시 김정호 선생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개성삼업조합(開城蔘業組合) : 1933 3 김정호 선생은 이사에 취임했다.

 

경기도회(京畿道會) : 1933 5 김정호 선생은 경기도회 의원으로 당선됐다.

 

개성상공회의소(開城商工會議所) : 1933 6 김정호 선생은 창립위원장으로 취임했으며 1933 8 회두(會頭) 당선됐다.

 

-사진 -1934 3 16일자 고려시보에 기고한 개성상공회의소 김정호 회두의 글

 

중추원(中樞院) : 1935 6 일제의 강권(强勸)으로 김정호 선생은 중추원 참의(參議) 취임했다.

 

주식회사 고려시보사(株式會社 高麗時報社) : 1933 창간한 고려시보는 1935 7 3 주식회사 체제로 발족했으며 1()원을 희사한 김정호 선생을 사장으로 추대했다.

 

주총사진 untitled- 고려시보 주식회사 창립총회 기념촬영 ; 앞줄 왼쪽부터 세 번째가 김정호 사장

 

개성삼업주식회사(開城蔘業株式會社) : 1936 8 김정호 선생이 회사를 설립하여 공성학을 사장에 앉히고 자신은 전무에 취임했다.

회사의 설립은 인삼경작자 모임인 개성삼업조합 총회에서 결의된 것으로, 개성의 전통적 산업인 인삼업(人蔘業) 부정상인에 의해 남조(濫造)되고 부당이윤을 챙기는 폐해가 심해져 이를 바로잡기 위해 백삼제조판매를 통재하기 위한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고려시보사(高麗時報社) 신사옥(新社屋) : 1937 4 10 고려시보 창간 4주년을 맞아 사옥을 신축했다.

 

-사진 0196- 신축한 고려시보사 사옥 ; 오른쪽 원내 김정호 사장 왼쪽 원내 공진항 부사장

 

고려시보사(高麗時報社) : 1938 7 5 고려시보 3 정기총회에서 김정호 선생이 취체역 사장으로 추대됐다.

 

-사진 0814-고려시보 제3회 정기총회 후 기념촬영 ; 앞줄 왼쪽부터 네번째가 김정호 취체 역 사장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 :

송고실업장은 1907 설립된 소규모 직조공장(織造工場)이었다. 초기에는 한영서원(韓英書院) 부속 공장으로 한영서원 생도들을 도제(徒弟)로서 실습케 했었다.

1920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데일 감독아래 시설을 늘리고, 송도고보(松都高普) 고학생(苦學生)에게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일할 있는 직조공장으로 변했는데, 이들 학생들을 반공생(半工生)이라 했고 이들은 이곳 송고실업장에서 기능을 익힌 다음 졸업 후에는 기술자(技術者) 입사하는 기회도 주어졌다.

미국에서 역직기(力織機) 자동양말직기(織機) 등을 구입, 시설을 확장하고 직원도 늘려 1920년대 말까지 활발하게 운영되어 왔다. 생산품인 송고직() 셔츠나 치마를 입어본 사람은 옷감이 질기고 부드러우며, 세탁 후에도 탈색(脫色) 되지 않는 우수성이 증명되자 일본 수입품인 면직 보다도 송고직을 먼저 선택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독일 훽스트염료화학회사가 발명한인단스렌이라는 염료(染料) 수입해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송고직은 전국적으로 인가가 있었으며 일본, 중국, 인도, 동남아에 수출했을 아니라 유럽, 미국시장에서도 수출의뢰가 들어왔었다. 이렇듯 세계 각지로 수출하며 황금기(黃金期) 누렸던 송고실업장은 돌연 1926 세계경제공황(經濟恐慌) , 간접으로 영향을 받아 판매가 부진해지면서 설상가상으로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부에서 손을 떼게 되자 공장가동을 중단해야할 위기에 처했고 1920년대 말에 와서 경영난에 빠져 공장매도(賣渡)까지 이르게 됐다.

1929 김정호 선생의 주도로 개성 유지(有志) 20여명이 20()원의 주식을 투자, 공장을 인수하고 주식회사 체제하에 김정호 선생이 사장에 취임했다.

주식회사 송고실업장의 초대 임원진은

사장 ; 김정호(金正浩)

이사 ; 마종유(馬鍾濡), 공성학(孔聖學), 김영택(金永澤), 최증한(崔增漢), 최인용(崔仁鏞), 임한조(林漢祖), 황중현(黃中顯), 윤영선(尹永善)

감사 ; 최선익(崔善益), 김학형(金鶴炯), 박상옥(朴尙玉), 백낙준(白樂濬), 박봉진(朴鳳鎭)

 

주식회사(株式會社) 송고실업장이란 명칭으로 1929 2월부터 새롭게 경영을 시작한 공장은 기계와 설비기 완전하였기에 직원 150여명으로 , 없이 가동하였으며 유명한 송고직(松高織) 60종과 송고양말을 생산하였다. 첫해 생산액이 20만원이나 됐고 판로는 세계 26개국에 달해 그동안의 은행부채를 갚는데 기여할 있었다.

외국에서 비싸게 수입한 직물에 비해 손색이 없었으며 1920년대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주도가 돼서 국산품을 애용하여 민족경제력을 키우자는물산장려(物産獎勵) 운동 있던 시기라 송고직에 대한 국민의 호응이 컸었다.

 

개성전기주식회사(開城電氣株式會社)

 

사진 개성전기주식회사 책자

김정호 선생의 기업활동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개성전기주식회사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 경영의 유일(唯一) 전기회사로 이름이 났던 개성전기(開城電氣) 김정호 선생 주도하에 설립되었고, 1936 서선전기(西鮮電氣) 합병될 때까지 사장으로서 운영을 총괄하였다.

 

경제학의 석학(碩學) 고승제(高承濟) 박사의개화 100 인물경제사(人物經濟史)’ 보면개성전기주식회사는 개성상인의 저력을 과시한 하나의 ()이다. 회사 창립에는 개성의 거부(巨富) 상인들이 대부분 참여했는데 개성상업의 양대(兩大)세력인 영신사(永信社) 손봉상, 개성사(開城社) 박태현을 비롯하여 김정호, 김득형, 김원배, 김기영, 공성학, 최증한, 고도후 내놓라 하는 거부 상인들이었다.”

이는 개성상인의 획기적(劃期的) 사건으로 자기들이 힘을 모아 전기회사라는 근대산업에 뛰어든 것이며, 전기사업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인(日本人)들에게 도전장(挑戰狀) 것이다.”

개성전기의 핵심인물은 김정호(金正浩)였다. 그는 회사 설립과 운영에 온갖 정열을 다했다. 그는 부동산 40만원 기타 30만원의 거대한 재산가였는데세리(細利)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전기업(電氣業) 같은 거업(巨業) 세우는 것이 개성지방과 나아가 민족발전에 공헌(貢獻)한다라는 것을 설립 취지문(趣旨文) 밝힌바 있다.”

 

김정호 사장의 회고(回顧) 의하면

개성에 전기회사를 세우려는 생각은 1914년부터였다고 한다. 일본 공업계를 시찰하고 김정호 성생은 개성 유지 34명과 함께 전기사업(電氣事業) 개성에 개시하자는데 합의를 보았다.

김정호 선생이 전기사업에 주목한 이유는 개성의 상업(商業) 조선내에서 1위일 만큼 발달하였지만 공업(工業) 그렇지 못했다. 개성은 생산품이 부족하여 원료공급이 충분치 못하였을 아니라 공업발전에 필수인 전기동력(電氣動力) 불완전하여 근대공업으로 발전할 여지가 없었다. 이에 대해 개성 유지들과 상의하여 전기회사를 설립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1915 가을 개성전기(開城電氣) 창립 사무소를 개성 동부 김정호 선생 집에 설립하고 사업을 추진했으나 1917 1월에야 전기사업 허가를 얻을 있었다. 당시 회사 자본금은 5만원으로 1 50원에 주식 1,000주를 발행한 주식회사 체제였다.

1917 4 14 개성전기주식회사(開城電氣株式會社) 창립총회를 개최하였으며

초대 임원으로는 김정호(金正浩), 김기영(金基永), 김원배(金元培), 공성학(孔聖學), 구니시게 세이료(國重政亮)

감사역에 김득형(金得炯), 공성초(孔聖初), 우쓰이 미즈키(臼井水城)

전무에 김정호(金正浩)

명예고문에 자작 조중응(趙重應) 경성전기 사장 나가오카 마사이(長岡正矣) 추대 했다.

 

개성전기(開城電氣)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1917 4 14일에 회사를 창립했으나 1 후인 1918 4월에야 전력공급으로 전등(電燈) 있었는데, 이는 사이 원료인 석탄 값이 급등하고 자금의 압박으로 사업을 중단하려고도 하였으며 이러한 어려움을 김정호 선생이 단독으로 타개해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무적으로 전기회사를 경영한 이는 창립위원인 최증한(崔增漢)이었다. 그는 김정호 선생과 같은 일본 메이지대학 출신으로 개성의 꼽히는 부호였다.

발전소를 건설하고 발전기를 도입하는데 자금이 부족하여 1918 주총에서 5만원을 증자하여 자본금이 10만원이 됐고 1922 주총에서는 10만원을 증자, 1928년에는 자본금이 50만원으로 증자되었으며 서선합동전기에 합병되던 1936년에는 자본금이 100만원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었다.

 

초기에는 야간에만 전력을 공급하였으나 개성시민들의 요청으로 설비를 증설하고 야간으로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설립당시 개성시내 350호에 1,000() 공급했던 것이 1922년에는 2,258호에 등수(燈數) 5,527등으로 증가했으며, 1926년에는 8만원을 투자하여 독일에서 300마력(馬力) 원동기를 들여와 그동안 200마력 일제 원동기의 잦은 고장이 개선되어 20,000() 고장 없이 공급할 있었다. 이는 전력을 300kw 발전하여 10촉으로 환산 20,000등을 있는 수치이다.

이처럼 개성전기는 설립당시는 자금난으로, 이후 수년간은 잦은 고장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0년이 지난 1927년에는 누구나가 경탄할 만큼 놀라운 발전을 하였으며 특히 주주들에게 매년 10%라는 높은 배당을 있었다.

 

사세확장에 따라 개성전기는 사업영역을 확대해 갔다.

1928 자본금을 50만원으로 증자한 황해도 신막에 100kw발전소를 설치하고 서흥지역에 전력공급을 하였다. 1933 무렵에는 공급구역이 40 곳으로 늘어났고 10,000(10 환산) 이르고 있었으며 장단, 고랑포, 토성 등지에도 확장 공급했다.

1935 무렵 발전소는 계정(鷄井) 있었고 스위스제 1,650마력 1,000kw 발전기로 전력을 생산하여 개성부내는 물론 경기도 파주, 장단 그리고 황해도 금천, 평산, 서흥, 봉산과 개풍 1 7군에 전력을 공급했다.

 

개성전기는 국내 최대의 민족자본(民族資本) 회사였다. 회사는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였을 아니라 20년간을 인화와 단결로 끌어온 모범기업(模範企業)이었다.

김정호 선생은 전기회사의 허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발부되었음에도 연장자인 김기영(金基永)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전무로 앉아 회사 운영을 총괄했다. 회사가 창립된지 5년만인 1920 비로서 김정호 선생 자신이 사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사장 김기영은 이사로 물러났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가 없이 끝까지 회사를 이끌어 갔다는 것은 사람의 인간관계가 돈독(특별)했음을 증명해 준다.

개성전기는 3(1920)부터 주주에게 8% 배당을 있었으며 7(1924)에는 11% 높은 배당을 했다. 창업후 20년간 평균 10% 배당을 하였는데 시설투자가 높은 전기사업에서 이례적(異例的) 경영성과를 올린 것은 우리나라 전기업계의 기적(奇蹟)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개성전기가 매년 10% 배당을 있었던 데는 기본적으로 회사의 업적 향상에 기인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개성 시민들의 지원도 기업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초기 개성전기는 잦은 고장과 비싼 요금 때문에 개성 시민들이 불만(不滿) 많았다. 그렇지만 개성 사람들은 개성전기회사가 조선민족(朝鮮民族), 개성인(開城人) 기업이라는 생각에 이런 불만을 어느 정도 감내(堪耐)하였다. 예컨대 언론에서는 개성전기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루었다.(조선일보 1922. 12. 25)

다른 지방에서는 물가조절을 하기 위해 전기 요금을 내리는데 개성전기회사는 오히려 요금을 올렸다.”

고장이 잦아 전등 수요자들이 말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을 받는다. 개성 전등은 한번 고장이 생기면 적어도 56일이오, 길게는 한달 두달이니 고통이 이루 말할 없다.”

이처럼 언론은 개성전기의 비싼 요금, 잦은 고장에 문제점을 지적하였지만 개성사람들이 이에 절대적으로 호응한 같지는 않다.

특히 개성 사람들은 개성전기회사의 사업을 자기의 사업으로 생각하여 회사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이를 참고 견디었고, 다른 자방 사람들이 비평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극구 변명하기도 하였다 언론은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개성사람들의 동정(同情) 지원(支援) 있었기에 개성전기회사는 순조롭게 발전할 있었다. 1920 무렵 우리나라의 전기회사 수는 66개였는데 순수민족자본의 전기회사는 개성전기를 비롯 5개로 거의 자본금 10만원정도로 일본기업에 비해 영세기업이었다. 유독 개성전기만은 자본금 50만원을 가춘 일본전기회사에 버금가는 회사로 전력을 서울 당인리 지역까지 송전할 있었다.

그러나 개성전기는 바로 때문에 서선합동전기로 흡수합병(吸收合倂)된다.

일본 총독부는 전기사업에 참여한 민족자본을 몰아내고 일본자본의 독점체제를 가춘조선전기 사업령 1932 2 공포, 총독부는 법령을 근거로 대대적인 통합에 나선다.

당시 평양에 일본재벌의 조선전기흥업주식회사가 있었는데 회사는 경영난에 처해있었다. 총독부는 1934 회사를 육성시킨다며 개성전기를 강제 합병(合倂)시켰다. 개성전기가 민족자본의 가장 우수한 회사였기에 맞이한 비운(悲運)이다. 1936 12 개성전기(開城電氣) 새로 발족한 서선합동전기주식회사(西鮮合同電氣株式會社) 합병되고 만다.

그리고 김정호 선생에게는 상무취체역 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선생의 소유주식은 3330주로 평양시 7만주, 동척 47천주, 조선신탁 17천주에 비하면 소액주주였다.

 

김정호 선생은 개성전기를 넘겨준 다음에도 기업가 활동을 계속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김정호 선생은 1936 개성삼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공성학을 영입, 자신은 전무취체역에 앉아 경영에 몰입했다. 이는 개성상인의 운명을 정확하게 말해주는 사례이다. 인삼업(人蔘業)에서 시작하여 전기회사를 창업한 개성상인들이 다시금 인삼업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기에 김정호(金正浩) 선생에 관련된 일화(逸話) 가지를 소개한다.

 

김정호 선생 창씨 개명(創氏改名) 거부하고 우리 () 이름 지킴

창씨 개명은 일제 강점기 민족 말살정책의 하나였다.

1940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개정하여 조선인의 성명제(姓名制) 폐지하고 일본식 ()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한편 창씨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불이익(不利益) 가해졌는데

1) 자녀에 대한 학교 입학이 금지되고

2) 식량 배급 대상에서 제외됐으며

3) 공공기관 근무를 없었고

4)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 찍혀 요시찰 대상이 됐다.

이러한 강압에도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자결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부당함을 비방하다가 구속된 사람이 많았다.

 

이때 김정호 선생은 조상(祖上) 대대로 내려오는 고유한 () 바꿀 없다고 고집하고 집안이 김씨 (金氏 ) 그대로 쓰기로 경정하였다. 이에 총독부는 김정호 선생의 비중과 개성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그대로 묵인한 듯하다. 김정호 선생은 성명의 일본어 표기를 かな せいこう(金正浩) 한자 이름을 그대로 일본어로 표기하였다. {혹시 かね せいこう라 호칭 하셨는지요? 어머님이나 다른 어른께 여쭈어 주시오.}

 

군정의 배급제와 김정호 선생의 자유판매제 주장

1945 8 15 해방을 맞이한 개성은 9 15 미군의 입성을 크게 환영하였다. 미군은 개성부청(開城府廳) 접수하고 군정(軍政) 실시하였으며 식량을 공급하고 배급제(配給制) 실시하였다. 그러나 배급제 실시후 식량(食糧) 사정이 악화되어 시중 쌀값이 폭등하고 품귀(品貴) 이르렀다.

군정은 쌀값 안정과 수급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개성의 유지이며 지도층인 김정호 선생 방중(房中) 방안을 자문하였다.

생산량이나 재고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배급제도의 결함으로 수급에 문제가 있다. 배급제도의 철폐(撤廢)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라는 답을 받고, 배급제가 철폐되고 차츰 자유판매제(自由販賣制) 환원하면서 식량 사정은 안정을 찾았다.

 

시국 강연·개성시민대회와 김정호 선생

1945 8 15 해방을 맞은 개성에서는 서울에서 활약하는 신생 한국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시국 강연회(時局講演會) 시민대회를 여러 차례 개최하였다.

대회 주관은 개성 사회단체의 주축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회장 ; 이승만) 개성지부(開城支部) 맡고 준비했으며 상당액의 경비(經費) 필요했다. 개성지부 김진원 총무(필자의 부친) 증언에 의하면 준비의 단계는 경비 마련이었으며 개성 동부에 있는 김정호 선생 댁을 찾아가 대회 준비에 경비가 소요됨을 설명했다.

김정호 선생은 없이 수표책을 꺼내 금액을 써서 주었으며아저씨가 맡아서 하니 틀림이 없겠지요라고 말씀했다고 한다. 말은 김진원 총무가 김정호 선생의 아저씨 항렬의 일가(一家)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회를 마친후 개성의 기업체, 단체 그리고 유지들에게서 성금(誠金) 거두어 김정호 선생에게 가지고 갔으나 번번이 수표로 받은 금액에 미치지 못하여 송구함이 켰었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고수고가 많았다 격려의 말씀을 주셨기에 사기 충천하여 일을 나갔가고 한다.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시국 강연회

 

사진 우남 이승만

1946 여름 국민회 개성지부는 이승만 박사를 초청하여 개성선죽초등학교 교정에서 시국 강연회를 개최키로 했다.

강연회 전날 도착한 이승만 박사는 개성의 유지이고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 지배인인 진씨 댁에 유숙하게 되었고 저녁에는 개성의 명사들과 국민회 간부들이 인사차 박사 숙소로 모였다. 개성지부 김진원 총무도 일원으로 박사에게 갔으며 늦어서 혼자 현관을 들어가며 옷걸이에 박사의 중절모자가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어른의 모자는 어떨가? 하는 호기심에 모자를 한번 보았다. 그런데 놀란 것은 모자가 눈까지 내려와 앞을 볼수 없었다는 것이며 박사의 머리가 보통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이야기다.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의 시국 강연회

 

사진 해공 신익희

1946 가을 독립촉성회 부위원장인 해공 신익희 선생을 초청하여 선죽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강연회와 시민대회를 갖기로 했다.

해공 선생은 하루 전에 개성에 도착하여 개성지부 김진원 총무 댁에 머무렀다. 다음 아침 강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국민회 간부와 명사들이 해공 신익희 선생을 모시고 양옥채 방에서 좌담회(座談會) 갖었다.

시간이 꽤나 자난 뒤에 중산(重山) 민완식(閔完植) 청년단장이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들어와서는 해공 선생 앞으로 나가 절을 올리며선생님, 늦게와서 죄송합니다 했다. 그러자 해공 선생은 미안해 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중산! 양말에 구멍이 났구려!”하고 우스개 소리로 난처해 하는 그를 달래려 했는데 아마도 절을 구멍난 양말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중산은선생님! 저는 요사이 너무 바빠서 구멍난 양말을 꿰매 신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돌려가며 신습니다하며 양말 구멍난 쪽을 발등 있는데로 돌려 신은 것을 보이고 좌중이 모두 한바탕 웃은 일이 있다. (이는 필자가 초등학교 5학년 좌담회가 열리고 있는 문틈으로 보았던 목격담이다.)

 

{김정호 선생에 관련된 일화(逸話) 추가와 1950 납북될 당시의 이야기}

 

[참고 자료]

김정호, ‘고려시보’, 1933. 4. 151941. 4. 16 간행

손봉산, ‘소산선생문집’, 1937 6 발간

양정필, ‘근대 개성상인의 상업적 전통과 자본 축적’,

2012 1 발간

김세량, ‘김정호 선생의 장손 증언’, 2012